...

제주 혼자 여행, 한라산에서 성산일출봉까지 하루에 걸은 날

성산일출봉 입구에서 비 오는 날 혼자 제주 여행 중인 모습

백록담은 못 봤지만, 오늘도 나는 한 걸음 더 갔다.

새벽 4시, 알람보다 먼저 눈이 떠졌다.

나이가 들어 새벽잠이 없어진 것이 아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새벽잠이 없었다. 어릴 때 별명이 ‘영감’이었다. 젊어서는 새벽 골프로 새벽을 지웠고, 팬데믹 때부터는 컴퓨터 앞에 앉아 코딩을 배우며 새벽을 보냈다. 그러다 GPT가 나오면서 이제는 AI와 함께 새벽을 보낸다.

오늘은 한라산에 오르는 날이었다. 혼자 성판악으로 향했다.

욕심 같아서는 백록담까지 보고 싶었다. 하지만 기상 상황 때문에 오늘은 진달래밭 대피소까지만 갈 수 있다고 했다. 조금 아쉬웠지만 괜찮았다. 내가 포기한 것이 아니라, 자연이 오늘은 여기까지라고 말한 것이니까.

배낭을 싸면서 잠깐 웃었다.

바나나 1개, 물 두 병, 초코바, 단백질 바. 소풍 가는 초등학생 가방이랑 다를 게 없었다. 예순이 넘고, 할아버지가 되었는데도 설레는 건 똑같다.

성판악 입구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QR코드를 받아 가기는 했지만, 막상 입구에 도착하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잠깐 어리둥절했다. 그때 뒤따라 들어오던 두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방법을 알아챘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들을 따라 들어갔다.

입구의 작은 유리창 안에는 나이 지긋한 분이 앉아 있었다. 그분이 오늘은 진달래밭 대피소까지만 갈 수 있다고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진달래밭 대피소에 갔다가 날씨가 좋아지면 정상까지 갈 수 있나요?”

그분은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런 일은 거의 없다고 했다.

QR코드를 찍고 숲길로 들어섰다. 우비를 챙겨 입고 비를 맞으며 걸었다. 다시 한라산을 오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걷는 동안 한 가지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지배했다.

다음에는 손녀 드림과 손자 클라우드를 데리고 오고 싶다. 그들에게 한국의 한라산 공기를 직접 숨 쉬게 해주고 싶다.

중간쯤 삼거리가 나왔다.

사라오름 못과 전망대로 가는 길, 그리고 진달래밭 대피소로 가는 길이 갈라졌다. 나는 주저 없이 사라오름 쪽으로 올랐다. 오늘은 백록담 정상까지 갈 수 없으니, 사라오름에 갔다가 다시 돌아 나와 진달래밭 대피소로 향하기로 했다.

결국 진달래밭 대피소까지 올라갔다.

그곳에는 비상용 헬기장도 있었다. 대피소에 앉아 초코바를 먹고 물 한 모금을 마셨다. 휴지통을 찾았는데 쓰레기통이 없었다. 본인 쓰레기는 본인이 가져가라는 뜻이겠지. 맞는 말이다.

내려오는 길에 많은 사람들과 스쳐 지나갔다.

젊은 사람들은 목례를 하거나 “안녕하세요” 하고 밝게 인사하며 지나갔다. 젊고 잘생긴 친구들이 인사도 참 밝게 한다. 나도 “안녕하세요” 하고 답례했지만, 지금 내 목소리 상태로는 그들에게 제대로 도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이 든 사람들은 인사가 별로 없었다.

왜 그럴까?

문득 궁금해졌다.

나이 들어 보이는 사람들도 많았다. 한국에서는 노인정에 60대가 들어가면 애기라고 한다던데, 여기서는 60대도 중년 정도는 되어 보였다.

오늘의 목표는 꼭 정상이 아니었다.

오늘도 한 걸음 더 간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욕심 많은 하루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라산을 내려오니 아직 12시도 안 됐다. 이제 어디를 가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섭지코지를 가보라고 했다. 그래서 아이폰에 섭지코지를 찍고 버스를 탔다.

그런데 도착해서 걸어가 보니 식당이 나왔다.

뭔가 이상했다.

다시 성산일출봉을 찍고 버스를 탔다. 결국 성산일출봉까지 갔다.

나는 제주도를 여러 번 와봤지만, 성산일출봉 정상에는 한 번도 올라가 보지 못했다. 매번 아래에서 사진만 찍고 돌아서곤 했다.

새벽부터 한라산 중턱까지 다녀왔지만, 이상하게 내 몸은 올라가 보자고 나를 부추겼다. 몸도 마음도 가벼웠다.

한라산은 무료였는데, 성산일출봉은 입장료가 있었다. 성인 기준 5천 원. 무료 코스도 있고, 정상으로 올라가는 유료 코스도 있었다.

정상으로 오르는 사람들은 주로 중국인들이 많았고, 국적을 알 수 없는 서양인들도 보였다. 오르는 길은 계단으로 되어 있어서 생각보다 험하지 않았다.

여기서도 또 손주들 생각이 났다.

드림과 클라우드를 데리고 오면 걸어 올라갈 수 있을까?

정상에 올라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여기는 일출 때 올라오면 정말 대박이겠다.”

내려오는 길의 경관도 너무 아름다웠다. 입장료가 전혀 아깝지 않았다. 누구든 제주에 오면 꼭 한 번은 올라가 보라고 권하고 싶다.

내려오니 절벽 아래에 해녀의 집이 보였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곳까지 내려가 그곳만의 정취를 느꼈다. 예전 같으면 전복에 소주 한잔 했을 텐데, 이제는 눈으로만 먹고 증명사진만 찍고 올라왔다.

다른 나라 같으면 구글지도를 열었겠지만, 한국에서는 역시 네이버 지도가 최고다. 네이버로 버스 노선을 찾아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은 멀었다. 그런데 그 긴 길마저도 재미있었다.

지도상으로는 산을 넘어오는 것 같았는데, 창밖으로는 구릉처럼 넓은 초원이 끝없이 펼쳐졌다. 보라카이에 사는 나는 같은 섬인데 이렇게 다를 수 있나 싶어 감탄했다.

오는 길에는 내가 즐겨 마시는 삼다수 회사, 아니 공장도 길가에서 보았다.

숙소로 돌아오는 동안 GPT와 계속 저녁을 어디서 먹을지 논쟁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새벽부터 땀에 젖은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냄새가 꽤 날 것 같았다.

그래서 바로 숙소로 왔다.

숙소에 도착해서는 쿠팡에서 며칠 전부터 알림으로 알려주던 무료 배달을 한번 시연해보기로 했다. 족발을 시키고 샤워를 시작했는데, 샤워가 끝나기도 전에 배달이 도착했다는 문자가 왔다.

숙소는 연동에 있는 힐스테이트 제주다. 주방 설비도 잘 되어 있고 세탁기도 있어서 빨래를 돌려놓았다. 빨래가 돌아가는 사이에 족발을 먹었다.

1인분짜리를 시켰는데 반 정도 먹으니 배가 불렀다. 약을 먹기 위해 먹는 저녁이니 이 정도면 충분했다.

새벽부터 시작한 하루였다.

비 오는 성판악에서 시작해, 사라오름을 거쳐 진달래밭 대피소까지 갔다. 백록담은 보지 못했지만, 한라산의 숨은 충분히 느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성산일출봉 정상까지 올라갔다.

오늘은 백록담을 못 본 날이 아니다.

오늘은 한라산과 성산일출봉을 하루에 담아낸 날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도 나는 한 걸음 더 갔다.

 

Scroll to Top
Seraphinite AcceleratorOptimized by Seraphinite Accelerator
Turns on site high speed to be attractive for people and search engines.